BLOG ARTICLE 사는 이야기/추억들 | 5 ARTICLE FOUND

  1. 2009.05.12 페이스북에서 어떤 친구요청
  2. 2007.11.29 1979년 중곡2동 골목길... 2
  3. 2007.11.13 이승환
  4. 2007.08.31 10년전 운영 하던 게임 프로그래밍 사이트
  5. 2007.07.07 냄비우동

이전에도 그렇게 열심히 한것은 아니지만 요즘은 페이스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간혹 외국인들로 부터 친구요청이 있지만 대부분 스팸 또는 광고성이라 답변을 하지 않는다. 오늘 친구요청을 확인해 보니 아래와 같은 요청이 있었다.


페이스북으로 로그인 해서 확인해 보니 1956년생의 독일쪽 누님 같았다. "죄송하지만 찾는 분이 아니며 꼭 찾길 바란다"고 답장을 드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윗세대 분들은 국내나 해외 펜팔을 많이 했었던 기억이 났다. 요즘 같이 문자나 이메일등 보내면 재깍 답변이 오는 시대 보다는 긴 기다림이 필요했던 그 시대가 더 감성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를 못 받아본지 몇년 아니 십몇년이 지난건지...

1973년부터 1993년까지 무려 20여년을 펜팔 친구로 지내오셨을 텐데 중간에 연락이 두절된 것 같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독일 큰누님 꼭 찾길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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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3학년 무렵인 것 같다. 4학년 때 울산으로 이사를 갔으니 기억이 별로 없다. 사진은 그 무렵 살던 중곡 시장 근처의 골목길에서 찍은 것 같다. 누가 찍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제일 뒤에 볼록 쏫은 녀석은 친구 같고, 좌측은 나보다 조금 어린 동네 동생 같다. 제일 앞쪽 녀석은 친동생이다. (뒤에 조카인 주희가 있다.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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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승환은 나의 고등학교 4년 선배이다. 1집 출시 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되었다가, 라이브의 황제라는 칭호를 들으며 동안을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내 마음 속에서 멀어 졌다.
 
90년 겨울. 용평스키장 양식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손님이 적은 시간엔 나는 늘 이승환 1집을 틀어 놓고 들었다.

창문 밖의 스키장 풍경과 함께 조용한 홀에서 그의 노래들을 듣고 있으면 정말 기가막혔다. "넌 이 테이프만 맨날 듣냐"고 구박하던 이승환을 모르던 같이 일하는 분들도 나중에는 내가 틀지 않더라고 알아서 틀게 되었다.


이승환 1집 B.C 603의 노래들. 내가 어떤 가수 앨범의 모든 노래를 좋아했던 것은 이 앨범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다. 아직까지 제목만 봐도 아련하다.

  • 텅빈 마음
  • 크리스마스에는
  • 가을 흔적
  • 비추어주오
  • 사랑의 세상으로
  •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 좋은 날
  • 눈물로 시를 써도
  • 그냥 그런 이야기
  • 친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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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결혼 하자 마자 코넷에 계정을 얻어 게임 프로그래밍에 관한 사이트를 한 2년 정도 운영하였다. 지금은 홈페이지의 모습은 커녕 주소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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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아주 우연히 구글에서 게임 프로그래밍 강좌란 문구와 lch4pjh란 계정을 보게 되었다.

아 그렇구나. lch4pjh... 봉인된 기억이 풀려 났다. 결혼 초라 나와 집사람의 이니셜을 사용하여lch for pjh란 의미로 저 아이디로 kornet을 사용했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이트들의 예전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서 떨리는 마음으로 구글 검색에서 나온 주소
http://soback.kornet.nm.kr/~lch4pjh 을 입력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나오지 않았다.

lch4pjh
당시 사용하던 저 숫자 4가 실제 10여년을 살면서 영문 for를 의미했는지... 아니면 한문의 그것을 의미했는지 반성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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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초등학교 4학년 부터 중학교 2학년 까지 울산에서 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일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버스 통학을 하게되었다.

지금은 길이 넓어졌을 것 같은데, 내가 다니던 제일중학교는 시내에서 떨어진 앞은 논이고 뒤는 산인 외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 집에서 갈려면 항상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했다. 아침은 지각하면 안되기 때문에 2번 버스를 탔지만, 갈때는 걸어 나와서 한번만 버스를 탔다.

이유는 당시 80원인가 했던 버스비를 아껴 돈을 모으기 위해서이다. 이는 내가 절약정신이 투철한 소년이어가 아니라, 매주 토요일 점심으로 냄비우동을 먹기 위해서 이다. 이전에 어머니와 시내를 나갔다가 지하상가의 조그마한 우동집에서 먹은 냄비우동이 너무나 맛있었다.

나는 매주 토요일 점심에 냄비우동을 먹는 맛으로 항상 돈을 모아 토요일을 기다렸다. 당시 가격이 500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 맛 때문에 매 주 한번씩 꼭 먹은 것 같다.

시원한 국물과 통통한 면발에 김가루와 고추가루, 유부가 찌그러진 냄비에  담겨 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 거린다. 옛 생각에 요새도 간혹 포장마차나 분식집에서 냄비우동을 먹어 보지만, 그 때  만큼 깊은 맛이 나는 곳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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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당시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한 직 후에 찍은 증명 사진이다. 지금 보니 나 같기도 하고 아들놈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교복은 딱 1년 입어 보았다. 2학년 때 교복 자율화가 되었을 때는 얼마나 기쁘던지...

하지만 까만 모자와 교복을 입고, 작은 키에 전형적인 중학생 가방을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시골길을 걸어 다니며 우동을 먹기 위해 목숨걸던(?) 그 시절 나의 모습을 생각하니 미소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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